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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8. <부정공>국회부의장 춘산 연하 행장(國會副議長 春山 淵夏 行狀)
1. 문헌 목록 〉22. 22世 〉10. <부정공>창암공휘종덕묘갈명(滄庵公諱鍾悳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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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정공>처사휘종현(연승)가장(處士諱鍾賢(淵昇)家狀)
處士諱鍾賢家狀 公諱鍾賢字慶和玉川人玉川淳昌舊號也趙氏以高麗檢校大將軍諱璋爲遠祖其後洪珪版圖判書佺文科追封府院君元吉號農隱登進士 恭讓朝以定策勲封玉川府院君與圃牧陶冶相追逐世稱五隱麗末見時事退居梓鄉及卒 贈諡忠獻享武夷院諱瑜號虔谷以進士文科中顯大夫典農寺副正前後喪居廬六年繼母亦如之我 朝徵以漢城尹不就入杜門洞南下順天潔身以終 世宗旌之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幷褒其忠孝享謙川祠斯文以左軍司正 贈吏曹叅議智崙察訪與四昆季作亭共處扁以相好爲南士矜式穩官尚瑞院直長淑璟忠順衛大春號三灘蔭勵節校尉與金河西白玉峰爲道義交見乙巳士禍隱於漾碧亭講論吟哦石面有三賢船遊錄懋號撫松亭 嘉靖間以經學薦禮賓寺參奉晫宣敎郎時聖號觀水亭通德郎以孝旌維綱之藩 崇禎末不仕而皆天泰望號咏歸堂游清沙忠正公金先生在魯門亦以孝旌崇夏以成均生員爲泮首游鰲川韓先生伯愈門弟器夏遊屏溪尹先生鳳九門友愛尤篤應淳邦根觀燁皆以志行聞上系諱與事實幷錄之考諱龍奎號碁隱幼喪母致哀後喪如前王考八年委席能致其憂居喪以禮亦以孝聞妣順興安氏思義女文成公裕后性度貞淑善事舅姑以 純廟己丑二月二十五日生府君於谷城木寺洞坊道藏洞第即僑居地而後二年還故府君天性溫厚氣質淳朴自幼未甞與人爭競常有愛親敬長之心十歲掩卷而嘆曰吾家貧窶上有重堂終鮮兄弟者讀而不耕則誰奉菽水之供乎遂力役而用天因地謹身節用養致其樂勤於奉先重金買山卜宅安厝每有地師之過訪則使之登壟問其吉凶款接厚資而送之別藏米醬菜果每値喪餘致齋致誠庶羞之具親自務潔陳設時以火燭之察其不精去乙去翠之屬亦置潔處使之不踏且以先楸禁伐事繫梅營不得己有天水之行而適値祖考與妣位安氏同諱之辰暴雨自朝至夕家眷意其未到矣雖正月短晷即抵五舍之地而行祀種種展墓周省三匝鋤其雜卉曰父祖白骨豈敢置於荊棘蓬篙之中乎至於山奴極爲愛恤曰此輩非但禁馬禁伐或有欝攸之犯山則焦爛頭額救其塋域之禍者豈不愈於遠居子孫乎使不肖初就塾與之昏往來晨朝到聽其吚唔之聲敎其楷正之字曰期於孜孜無惰爾遂吾願至於塾師常待以不時之需不惜四友之價勤學之誠如此常訓不肖曰吾少時服役而不與常漢爲隊盖爲人之道當親其可親烟酒爲侍下者不可則素所不近故平生不吸則汝謹守吾戒禊則傷誼之物故吾所不好而鄉約稧是呂籃田之美規也於我至五世花柳稧亦程伯子訪隨之意故與諸君子始創然且莫如同我婦子爲齊家之稧也吾家所以寒門冷族不出宦路則居鄉之道當擇其地閥操行家而嫁娶豈索重聘訃厚奩而取人譏笑哉寝疾十二日命不肖曰觀水公咏歸公碁隱 公三世之孝可旌未褒且墓無牲繫欲搆精舍者使汝講學而就正於長德之門矣是吾齎恨處也遂考終于正寝時八月二十一日也配淳昌林昌翰女杜門齋諱先味后安詳端重府君卺禮之席渾室以東床之年高至貧爲憂其外舅曰觀其容貌是吾快壻必有餘望更勿紛擾于歸之後念其重堂之奉出其婚衾解幅而線之引綿而織之買田一方以至蚕麻晝夜不撤家道免窘以成事育之樂癸亥丁内外艱甲子遭王姑憂朝夕三几筵饋奠時考妣哀痛之情不肖七八歲目擊而感泣者也不肖甞念府君末就之志辛巳建精舍以三公旌褒事五歲留洛先妣每夜汲水禱天天感其誠去辛卯十一月因士林上言以觀水公咏歸公之孝特蒙 恩典碁隱公之孝同爲八啓而以竢向後公議故二公旌額懸于精舍之大門上似遂府君之志然恨不使侍奉於精舍而以勢之不贍一未顯刻於墓石所謂工夫晚進於淵勉心三先生之門而自安暴棄無文於世豈敢副府君千一萬一之望哉先妣後府君十九年癸巳五月十九日沒有三男長不肖學洙次明洙仁洙學洙娶正言黃愼黙女武愍公進后明洙娶星山李俊淳女進士鍾器孫文景公稷后仁洙娶靑松沈榮澤女進士樂麟曾孫學洙有二男一女男東普娶延日鄭빇女文清公澈十世孫東悳娶進士任仲鉉女冠山君光世後女適蔚山金玉洙文正公麟厚十二世孫明洙一男二女男娶監察張斗錫女興山君機后女適昌寧曺 太師繼龍后女適長水黃二顯文科 贈提學暐九世孫側室一男一女皆幼仁洙早世一男一女男未娶女適金容奕光山府院君興光后東普二男二女皆幼東悳無嗣而嗚呼痛哉以若考妣仁孝慈愛之心宜有無疆之餘祿而豈使子孫有如此夭而無嗣耶此亦命耶運耶執筆爲狀倍切風樹之恨而不勝感涕也云爾 不肖子 學洙 泣血謹識 처사휘종현가장(處士諱鍾賢家狀) 공의 휘는 종현이요, 자는 경화(慶和)며 옥천 조씨이니, 옥천은 순창 구호였다. 조씨는 고려국 검교대장군 휘 장(璋)을 원조로 三전하여 휘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農隱)인데 진사로 공양조에 정책훈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하고 포은, 목은 도은, 야은과 더불어 세상에서 오은(五隱)이라 칭호하였으며 고려말에 정치가 날로 어지러움을 보고 고향으로 퇴거하여 별세함에 충헌이라 증시하고 무이원에 배향하였다. 휘 유(瑜)의 호는 건곡인데 진사로서 문과하여 중현대부 전농시 부정에 진급하고 전후상에 三년 시묘하고 계모상에도 같이 하였으며 이조에서 한성윤으로서 불러도 나가지 아니하고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남쪽 순천으로 내려가 몸을 깨끗이 하여 마치니 세종이 정포하되 효자전부정 조유지려라 하였으니 충효를 아울러 포양한 것이고 겸천사에 배향하였다. 사문(斯文)은 좌군 사정으로 증 이조참의요, 지륜(知崙)은 찰방으로 四형제가 정자를 지어 함께 거처하고 상호(相好)라고 현판을 하니 남방 선비의 자랑한 바 되었고 온(穩)은 벼슬이 상서원 직장이요, 숙경(淑璟)은 충순위며 대춘(大春)의 호는 삼탄인데 음여절교위로 김하서(金河西), 백옥봉(白玉峯), 양선생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고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양벽정에 숨어 강론 음아하고 석면에 삼현(三賢) 선유록이 새겨졌다. 무(懋)의 호는 무송정인데 가정(嘉靖) 연간에 경학으로서 예빈시 참봉에 천제되었으며, 탁(晫)은 선교랑이요, 시성(時聖)의 호는 관수정인데 통덕랑이요, 효행으로 정포하였고, 유강(維綱), 지번(之藩)은 숭정(崇禎) 말년에 벼슬 아니하고 다 일찍 졸하였다. 태망(泰望)의 호는 영귀당인데 청사 충정공 김선생 재노(在魯) 문하에 종유하고 또 효행으로써 정포하였고 숭하(崇夏)는 성균 생원으로 태학의 수두요, 오천 한선생 백유 문하에 종유하였으며, 아우 기하(器夏)는 병계 윤선생 봉구, 문하에 놀아 우애가 더욱 독실하였고, 응순(應淳), 방근(邦根), 관엽(觀燁)은 다 지행으로 성문이 있었다. 고의 휘는 용규(龍奎)요, 호는 碁隱인데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애통하였으며 뒤 초상에도 먼저 같이 하였고 왕고 八년 병석에 능히 근심을 다 하였으며 예제에 따라 거상하여 효행으로서 영문이 있었다. 비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사의(思義)의 딸이요, 문성공 유의 후로 성도가 정숙하여 시부모를 잘 섬기고, 순묘(純廟) 기축년(一八二九) 二월 二十五일에 부군을 곡성군 목사동면 도장동집(곧 임시로 산 집)에서 출생하여 二년 뒤에 환고하였다. 부군이 천성이 온후하고 기질이 순박하여 어려서부터 일찍 사람과 다툰 일이 없고 항상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 十세에 책을 덮고 탄식하되, 우리집이 가난한데 위로 중당이 계시고 아래로 형제가 적은 자가 읽고 갈고 닦지 아니한즉 누가 부모를 봉양할 것인가. 마침내 힘써 일하여 하늘에 맡기고 땅에 의지하여 몸을 삼가하고 존절하게 봉양함으로서 그 즐거움을 이루고 선영 받들기를 부지런히하여 중한 돈으로 산을 사서 음택을 가려 편안히 모시며 매양 지사(地師)가 찾아오면 데리고 산소에 올라 그 길흉을 묻고 후히 접대하여 보냈다. 제일을 당하면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제수의 숙정을 정결히 하고 진설할 때 부정을 가려버렸다. 또 선산 송추 금벌사로 진영에 매어 천수행이 있었는데 마침 조고 및 비위 안씨 제일을 당하여 폭우가 아침부터 저녘까지 내리니 가족이 도착 못할 것으로 알았는데 돌아와 행사하였다. 종종 성묘하여 잡초를 제거하며 말하되, 「부조 백골을 어찌 감히 가시덤풀 가운데 두겠는가.」하였다. 산지기를 극히 애휼하여 말하되, 「그들은 다만 우마를 금하고 벌초만 한 것이 아니라 혹 화재가 나면 머리와 이마를 데이면서도 그 묘역의 화를 구한 자이니 일찍 멀리 산 자손보다 낫지 아니한가.」하시었다. 불초로 하여금 처음 서당에 갔는데 새벽에 와서 책 읽는 소리를 듣고 그 해정한 글자를 가르쳐 가로되, 「기어히 근면하여 나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하고 선생은 항상 좋은 반찬으로서 대접하고 지필묵대를 아끼지 아니하며 권학한 정성이 이와 같았다. 항상 불초를 훈계하되, 「내가 소시에 천역을 하되 상사람들과 친구를 아니한 것은 대개 사람의 도리가 마땅히 가히 친할 자를 친해야 한다.」해서 였고 시하에 있는 자가 술과 담배는 불가한 고로 평생에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삼가 내 훈계를 지킬것이다. 계는 의를 상하기 쉬운고로 좋아하지 아니하나 향약계는 남전 여씨의 아름다운 법규가 나에게 이르러 오세가 되고 화류계는 정백자 방수의 뜻인고로 제군자와 더불어 창시하였으나 우리 부자 형제가 제가의 계를 한 것만 같지 못하다. 우리집이 寒門 冷族으로 환로에 나가지 아니하였은즉 향 사대부가 마땅히 그 문벌과 조행가를 가려 혼인할 것이요, 「어찌 혼수의 다과를 의론하여 타인의 조소를 사겠는가.」하셨다. 병환이 나셔 十二일에 불초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길 「관수공, 영귀공, 기은공 三세의 효행은 정포한 것이 옳은데 못하고 또 묘도에 상석이 없고 정사를 짖고자 한 것은 너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여 장덕의 문하에 취정을 원한 것이니 이것이 나의 유한이다.」하고 마침내 정침에서 별세하시니 때는 八월 二十一일이었다. 부인은 순창(淳昌) 임창한(林昌翰)의 딸이요, 두문재 선미의 후로 안상하고 단중하며 초례 자리에 신랑의 나이 많고 가난함으로서 온 집안이 근심하니 장인이 말하되 그 얼굴을 보니 이는 나의 좋은 사위니 반드시 여망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신행 후에 그 중당의 봉양을 생각하여 그 혼금을 폭을 갈라 실을 하고 솜을 내어 짜서 밭을 사고 침선 방직을 주야 근속함으로 가도가 여유가 생기니 사육의 즐거움을 이루었다. 내외간을 당하고 갑자년(甲子年)에 왕고상을 만나 조석 三궤연 상식에 고비의 애통한 정은 불초가 七八세 때에 눈으로 보고 감읍한 바라. 불초가 일찍 부군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여 신사년(辛巳年)에 정사를 세우고 삼공 정포할 일로 五년 동안 한양에 머무는 데 선비가 밤마다 물을 길러 하늘에 기도하니 하늘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신묘년(辛卯年) 十一월에 사람의 주청에 의하여 관수공, 영귀공의 효행은 특별한 은전을 무릅쓰고 기은공의 효행을 함께 입게 하였는데 후재(後栽)를 기다리라 함으로 이공(二公) 정문 액자만 정사 대문 위에 걸어 부군의 뜻을 일운 것 같으나 함께 정사에 시봉치 못한 것이 한스럽고 가세가 넉넉치 못함으로써 빗돌에 현각 못한 것이 여한이었다. 공부는 만시에 연재, 면암, 심석, 三선생의 문하에 나아갔으나 스스로 세상에 글이 없다고 포기하였으니 어찌 감히 부군의 소망에 부응하겠는가. 선비가 부군보다 十九년 후인 계사년(癸巳年) 五월 十九日에 별세하였다. 아들은 학수(學洙), 명수(明洙), 인수(仁洙)요, 손자 동보(東普), 동덕(東悳)과 울산(蔚山) 김옥수(金玉洙) 처는 큰아들 소생이며, 동협(東協), 창녕(昌寧) 조희봉(曺喜鳳), 장수(長水) 황이현(黃二顯) 처는 둘째아들 소생이고, 광산(光山) 김용혁(金容奕) 처는 三남 소생이며, 동보 二남 二녀는 다 어리고 동덕은 후사가 없으니 아! 슬프다. 고비의 인효 자애한 마음으로 마땅히 한량없는 경복이 있을 것인데 어찌 자손이 이와 같이 일찍 죽고 후사가 없는가. 이 또한 명인가, 운인가. 붓을 잡고 장문을 쓰며 풍목(風木)의 슬픔이 배나 간절하여 감창한 눈물을 금치 못함. 불초자(不肖子) 학수(學洙) 읍혈(泣血)하고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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